번역은 창작이다. 원문을 있는 그래도 직역은 하는 것은 바른 번역이 아니다. 그렇다고 원문을 무시한채 번역가의 역량대로 지나친 의역을 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번역가에게 필요한 것은 균형적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왜 갑자기 번역 얘기를 하느냐 하면, 

이 책 읽기가 쉽지 않다. 처음엔 내용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 쯤엔 번역의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가의 문제일수도 있고, 생소한 프랑스 문화와 결합된 번역이어서 그럴수도 있다. 중요한 건 문장 하나를 읽는 것이 쉽지 않다. 즉 문장력이 떨어진다. 한 문장을 꼽씹어 읽어도, 그 한 문장이 모두 한글로 쓰여있음에도 대체 무슨 말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한다. 

서양식 이름으로 인해 흐름이 끊기는 부분도 있다.


책 제목은 정말 유혹적이다. 읽지 않고 책에 대해 말 할 수 있다니... 그리고 바로 따라온 생각은 작가의 개똥 철할이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나서는 수긍의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책을 읽지 않고 말 할 수 있어야 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책과 너무 가까워지면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그 책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마치 책은 신성한 것이고 독서는 무해백익이라는 고정 관념이 가득한 세상에 대해 일침을 날린다. 그러한 고정 관념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창조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실 처음엔 무슨 이런 책이 있나 싶었다. 헌데 생각해보니 내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아니 많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내용이 있거나 저자가 마음에 들면 그 책의 사상에 빠져들게 된다. 이미 그때는 비판의식이 사라지고 객관적이지 못한 눈으로 책을 바라본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창조력을 잃고 뻔한 감상과 깨달음으로 책을 마친다. 


창작, 그것이 결론이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왜 책을 읽지 않고 말해야 하는지 모두에 대한 결론이다.

번역가가 이 핵심을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면 번역에 있어서도 창작의 효과가 나타났을까 싶지만 번역을 읽지 않고 할수는 없는 노릇이니...


Posted by J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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