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걸으며 사진을 찍어 봤다.
'전체'에 해당되는 글 405건
- 2013.07.11 snap
- 2013.07.10 하루의 첫 커피이자 마지막 커피
- 2013.07.09 사람은 아는 만큼 말하는 법
- 2013.07.06 달리기
- 2013.06.30 마무리
- 2013.06.15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2013.06.12 여름엔 역시
- 2013.06.10 책읽기와 글쓰기
- 2013.06.10 퇴마록 외전
- 2013.06.09 돌고 돌아
- 2012.09.21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2012.09.21 명품수필을 쓰기를 위한 길라잡이
- 2012.09.17 책 앞에서 머뭇거리는 당신에게
- 2012.09.12 하루를 보내는 단상
- 2012.09.12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 2012.09.11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2012.09.06 에스프레소 그리고 카페
- 2012.09.06 나의 카메라는 39.5
- 2012.09.04 요즘은
- 2012.08.27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오랜만에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내렸다. V60 사용.
한 때는 거의 매일 핸드 드립을 했었는데 요즘엔 좋은 기구들이 많아서 굳이 핸드 드립을 하지 않는다.
열심히 할 때는 나 스스로 느끼기에도 상당히 안정적이었는데 지금은 어떨런지.
그래서 열과 성의를 다해 내려봤다.
드립 포트도 가장 좋아하는 칼리타 기본 포트를 사용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뜸들이는 정도도 알맞았고 물줄기와 양, 그리고 위치도 마음에 들었다. 핸드 드립은 편차가 상당히 큰 브루잉 방법이라 그리 선호하진 않지만 정말 안정적인 추출이 동반될 때는 그만한 맛과 향을 내준다.
커피 맛은? 맛있었다.
늦은 오후에는 보통 커피를 마시지 않지만 오늘은 한 잔도 마시지 않았기에 과감히 내렸는데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다.
커피는 내가 볶는 코스타리카 마이크로 랏.
처음 플레이버가 조금 약한 느낌이지만 단맛과 쓴맛의 조화가 훌륭하다. 또 컴플렉시티 역시 좋다. 마시고 나면 민트, 박하의 스파이시 한 개운함이 있다. 무엇보다 클린컵이 훌륭하다.
하루의 첫 커피이자 마직막 커피로 모자람이 없다.
그래도 오늘 같이 커피 내려마시기 귀찮은 날은 머신 한 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사진은 제주의 한 카페.
내용과 일치하는 사진이 좋은데 오늘은 커피 내려마시기도 힘들었다고.
사람은 아는 만큼 말 할 수 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은 말 할 수 없다. 자신이 모르는 것인데도 말을 한다면 거짓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실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자신이 얼만큼 알고 있는지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 많이 아는 사람은 겸손한 경우가 많다. 앎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그 끝을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터뷰 기사를 하나 봤다. 아는 사람이었다. 허나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달랐다.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왜 그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그리 확신을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가 옳을 수도 있고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사실을 이야기하는 동안 어느 누군가는 상처를 받는다. 자신의 앞가림을 위해 순간적인 사실 왜곡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장마라지만 덥고 습한 날씨가 생소하다. 정말 아열대 기후에 속하게 된 대한민국이다. 이런 날씨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을듯 하다.
장마가 시작하는 주였지만 어쩌다 보니 더 열심히 뛰었다.
아마 언제 비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틈만나면 뛰었던 것이 그 이유인듯 싶다.
내일까지 뛰면 주 5일이다.
- 흐린 날과 맑은 날의 GPS는 오락가락 한다. 때론 1Km까지 오차가 있다. 중요한건 내 몸이 기억하는 거리니까.
- 새벽에 운동을 나가보면 어르신들이 많다. 젊은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건강은 젊어서부터 지켜야 한다.
- 새벽에도 뛰고 오후 늦게도 뛰지만 이상하게 새벽에 뛰는 것이 더 힘들다. 예전엔 안그랬는데.
- 새끼 오리 2마리가 엄마 오리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는 모습을 봤다. 기억에 남는 아침 풍경이다.
마지막 날이다.
많은 일이 있었던 한 달이었다.
그리고 벌써 2013년이 반을 넘어섰다.
이젠 그만 계획하고 움직일 때다.
열심히 읽고 썼지만
여전히 너무나 부족함을 느낀다.
더 깊이 있는 삶이 되고 싶다.
그 사이 몇 권의 책을 더 읽긴 했지만 쓰고 싶은 것만 쓴다. 내 마음이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적어도 내게는 수필가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의 소설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물론 그 이름을 들어본 건 문예부 지도 교사의 추천으로 구입한 '상실의 시대'였지만 몇 장 넘겨보고 읽지 않았다.
비교적 최근에 그의 수필집을 읽어보고 그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는 첫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역시 읽다가 말았다. 그의 소설이 마음에 안든다기 보다는 그냥 그의 수필이 더 좋다.
재편집되어 재출간된 수필집과 이번에 나온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를 다 읽게 됐다. '그의 글을 다 읽고 말겠어' 라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의 글을 쉼을 준다. 조금 부담스러운 내용의 책을 읽을 때면 머리를 식힐겸 휴식이 필요하다. 그럴때마다 하루키의 책을 집어 든다. 짤막한 그의 글은 막간을 이용해서 읽기에도 최고의 선택이다. 비록 하루키는 막간용 도서로 동화를 추천하지만 말이다.
하루키의 수필은 너무 진지하지 않아서 좋다. 또 억지로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지 않아서 좋다. 일부는 그러한 스타일에 '남는게 없다'고 말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그렇다고 얻는게 없느냐? 그런것도 아니다. 인생은 해석이고 사람마다 사연이 다르다. 타인의 엉뚱하다 싶은 생각속에서도 타이밍에 따라 깨닫는 바가 있다. 때론 그 기발한 생각으로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는 기회가 된다. 뭐, 과도한 해석이라고도 생각되지만 어쨌든 재미있다. 가끔씩 눈에 쑥 들어오는 참신한 표현을 보는 것도 좋다.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의 제목도 신선하다. 보통은 그의 글 중에 담겨있는 표현을 골라 제목으로 삼는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을 보고 대체 어떤 글에서 가져왔을지 궁금했다.
나도 저녁 무렵에 면도할 일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커피 한 모금을 삼킨다. 쌉싸르한 향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그 뒤로 깊은 단맛이 역으로 올라와 입안을 가득 채운다.
평소엔 마시지 않은 강배전 커피의 매력이다. 워낙 산미가 강한 커피를 좋아하다보니 상대적으로 강하게 볶은 커피는 접할 기회가 없다. 하지만 여름엔 역시 강배전 커피다.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는데도 아직 어린애 입맛이라 쓴거라면 질색이다. 그렇다고 어린애들처럼 호들갑을 떨지는 않지만 어른의 체통은 지키면서 쓴 맛나는 것들을 품위있게 비켜간다. 그래도 가끔 쓴 것을 찾을 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여름에 마시는 강하게 볶은 아이스 커피다.
보통 강배전 커피는 바디와 단맛이 좋고 그 중심을 기분 좋은 쓴 맛이 잡아준다. 마치 입맛없을때 먹는 봄나물 같은 맛이라고나 할까? 그런 커피를 아이스로 내려 마시면 입안이 깔끔해지고 갈증이 달아난다. 그리고 쓴 맛 뒤로 쭉쭉 올라오는 천연의 단맛은 감히 인공의 시럽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은은함을 가지고 있다.
뭐 그래도 역시나 신맛나는 커피가 좋지만 오늘같이 비가 내리는 날엔 이런 커피도 괜찮다.
커피 사진을 찾아보니 죄다 에스프레소다. 어쩔수 없다. 역시나 심심하니 첨부.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읽는다. 그러다 보니 같은날 책을 끝마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도 그러한 날이다.
보통 책을 읽고 나서는 간단한 감상을 쓰기 마련이다. 그러한 작은 행위는 흘러가는 기억을 조금이라도 붙잡을 수 있는 발버둥이다. 게다가 일종의 책을 마쳤다는 의식이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다음 책을 잡을 수 있다.
글이라는 건, 적어도 내게는, 생각을 확장하는 도구다. 미리 생각한 것을 써내려가기 보다는 글을 쓰다보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글이 길어지거나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결론과는 다른 마무리로 글을 맺곤 한다. 일명, 쓰면서 생각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 큰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어쨌든 책을 읽었으니 글은 써야겠는데 사실 쓰기가 싫다. 조금 시간을 두고 읽은 책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지금 느끼는 것과는 다른 느낌을 느끼는 경우도 있으니까. 어쩌면 이 조차도 합리화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게으름인지도. 지금은 쓰고 싶지 않은 글은 쓰지 않을 권리(?)가 있다.
블로그에 글만 있으면 참 심심한 포스팅이 된다. 이럴 때 펼쳐진 책에 커피 한 잔이 있는 사진 한 장 있으면 덜 심심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터넷에서 긁어 올 수 있겠지만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막 퍼다 나르는 건 싫다. 앞으로는 블로그에 올릴만한 사진도 좀 찍어서 모아둬야겠다.
쓰다보니 참 두서없는 글이 됐지만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래도 심심하니까 사진 한 장.
독서를 그리 즐겨하지 않던 학창 시절에 '퇴마록' 시리즈는 내게 유일한 책 읽기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줬던 책이다. 그만큼 좋아했고 지금도 국내편을 제외한 모든 시리즈를 다 가지고 있다. 그리고 최근 '퇴마록 외전' 이라는 제목을 달고 또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퇴마록의 팬이라면 어찌 설레지 않을수 있겠는가?
퇴마록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기준이 되었던 책이다. 무협지라는 것을 알기 전에 퇴마록을 접했고 탄탄한 구성과 감탄할 만한 문장의 소설을 알기 전에 퇴마록을 읽었다. 그 내용들을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린 시절 이러한 재미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저자 이우혁씨가 어디선가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책은 재미있어야 한다. 재미있지 않은 이야기는 사람들이 읽지 않는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나부터라도 읽지 않으니까."
"소설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짜임새 있는 구성이 있어야 한다."
정확한 말은 아니겠지만 이런 비슷한 말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할 만큼 그의 생각은 내가 소설을 보고 고르는 기준이 되었다.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 흡입력이 있어서 단숨에 읽어내려 갔다. 다만 예전과 같은 '그런 재미'는 느낄수 없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내가 그동안 많은 책을 읽어왔고 또 시대가 그만큼 많이 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게다가 책 내용 자체가 사건이 생기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퇴마사들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에 흥미를 끌만한 요소가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여전히 '작가 정신'은 이야기 안에 녹아 있었다. 다른 무협 소설과는 다르게 명예, 절대 권력이 주제가 아니라 '생명'을 그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펼친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 당시에도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기대와는 조금 달랐지만 팬의 한 사람으로서 '퇴마록'이라는 추억을 꺼낼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앞으로 그들이 다시 돌아올런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지난 시절을 색다른 재미로 풍성하게 채워준 그들에게 감사를 보낸다.
결국 다시 돌어왔다.
여기저기 열심히 삽질했지만 '집중' 이란 단어만 묻혀있었다.
죽이되든 밥이되든(식상하지만) 시작하는 것이 지금 내게 필요한 것.
이걸로 밥벌어 먹고 사는 것도 아닌데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해야지.
이전에 즐거웠던 그 기억으로 말이다.
사진은 어디에도 쓰이지 못할 것 같지만 그냥 좋아하는 사진이라서 첨부.
번역은 창작이다. 원문을 있는 그래도 직역은 하는 것은 바른 번역이 아니다. 그렇다고 원문을 무시한채 번역가의 역량대로 지나친 의역을 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번역가에게 필요한 것은 균형적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왜 갑자기 번역 얘기를 하느냐 하면,
이 책 읽기가 쉽지 않다. 처음엔 내용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 쯤엔 번역의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가의 문제일수도 있고, 생소한 프랑스 문화와 결합된 번역이어서 그럴수도 있다. 중요한 건 문장 하나를 읽는 것이 쉽지 않다. 즉 문장력이 떨어진다. 한 문장을 꼽씹어 읽어도, 그 한 문장이 모두 한글로 쓰여있음에도 대체 무슨 말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한다.
서양식 이름으로 인해 흐름이 끊기는 부분도 있다.
책 제목은 정말 유혹적이다. 읽지 않고 책에 대해 말 할 수 있다니... 그리고 바로 따라온 생각은 작가의 개똥 철할이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나서는 수긍의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책을 읽지 않고 말 할 수 있어야 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책과 너무 가까워지면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그 책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마치 책은 신성한 것이고 독서는 무해백익이라는 고정 관념이 가득한 세상에 대해 일침을 날린다. 그러한 고정 관념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창조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실 처음엔 무슨 이런 책이 있나 싶었다. 헌데 생각해보니 내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아니 많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내용이 있거나 저자가 마음에 들면 그 책의 사상에 빠져들게 된다. 이미 그때는 비판의식이 사라지고 객관적이지 못한 눈으로 책을 바라본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창조력을 잃고 뻔한 감상과 깨달음으로 책을 마친다.
창작, 그것이 결론이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왜 책을 읽지 않고 말해야 하는지 모두에 대한 결론이다.
번역가가 이 핵심을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면 번역에 있어서도 창작의 효과가 나타났을까 싶지만 번역을 읽지 않고 할수는 없는 노릇이니...
책 리뷰를 쓸 필요도 없는 책은 글로 남기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에 글을 남긴다.
저자 본인을 수필가라 칭하고 무한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
수필의 미덕은 형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형식이 형식'이라는 편안함으로 사람들에게 글쓰기의 부담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헌데 이 수필가는 수필을 또 하나의 형식에 가두어 두려고 한다. 저자가 말하는 바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요즘엔 블로그를 비롯해 글을 쓸 수 있는 여건이 좋아지다보니 너도나도 수필가랍시고 글답지 않은 글을 쓰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작금의 현실을 비난하기 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바라보고 수정, 발전 가능한 방향을 말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용 아무개 씨라는 참 시인 같잖은 시인이 시집이랍시고 묶은...'
이런 문장이 출판된 책에 딱 인쇄되어 있다니 놀랍다. 용 아무개 씨는 용혜원씨다. 시집과 시 한 편을 올려놓고 저런식으로 말 할 수 있는 용기가 부럽다. 글쓰는 이라면 당연히 비판을 겸허히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말을 합리화하기라도 하는걸까? 그래도 사람이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하는 법이다. 저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가시고기>의 작품성을 논하고 현 시대의 허섭쓰레기같은 글로 수필가라 자칭하는 이들이 많다고 끊임없이 얘기한다.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는 구석이 있지만서도 같은 말을, 그것도 비난의 말을 그 얇은 책에서 계속 듣다보니 독자로서 짜증이 날 지경이다.
그렇게 자신있는 분이라면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겸허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경험과 사색, 특히 사색이 중심이 되어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는 수필가가 하는 생각이 뭔지 의문스럽다.
기분좋게 읽기 시작했지만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책이다.
책에 대한 책 앞에서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잠깐이라도 들춰보게 된다. 책읽는 고수들의 노하우를 알고 싶기도 하고 다른 사람은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재미있는 책을 읽을 것과 책을 읽고 글로 남겨라.
저자가 책을 접하게 된 경험들을 구체적으로 말해주면서 어렵지 않게, 그리고 책을 읽는 행위를 부담스럽지 않게 풀어나간다. 그 사실만으로도 참 도움이 된 책이다.
재미있는 책을 읽으라는 것.
맞는 말이다. 무엇을 하든 재미있어야 한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종종 어려운 책을 읽다보면 책읽기가 부담스럽다. 그럴때는 소설이나 무협지를 읽는다. 그러면 손에서 책을 놓지 않게 되고 다시 어려운 책을 접할때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책을 글로 남기라는 것.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의외로 쉽지 않은 일이다. 마치 설거지는 독서와 같고, 설거지후 정리는 글쓰기와 같다. 책읽는 건 어렵지 않은데 글로 남기는 건 결심이 필요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최근 그 이유를 알았는데 내가 마치 서평을 써야한다는 일종의 부담감이 있는듯 싶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저자의 권유처럼 서평이 아니라 리뷰라는 생각으로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하나 더!
책 읽은 것이 아깝다고 무조건 리뷰를 쓰지는 않겠다는 것. 쓸 가치가 없는 책도 있다.
카메라 하나 달랑 둘러메고 여행을 떠나고 싶은 날이었다. 특별히 답답하거나 오랜 기간 여행에 대한 목마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별 이유없이 내가 있는 이곳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곳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지금의 상태도 좋지만 환경이 바뀐다면 조금 더 좋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 그리고 오랜만에 사진도 찍고 싶었다. 예전같은 열정을 되찾을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읽고 있는 책 덕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산문집이라고 되어있지만 시집같은 글이 가득한 책, 아주 잘찍은 사진은 아니지만 은은한 감동이 있는 사진들로 채워진 책이었다. 남성 작가의 글임에도 짙은 감성이 녹아있다. 부러움? 그럴런지도 모른다. 내가 쓰는 글은 감성을 기반으로 하기보다는 이성을 향해 부르짖는 글이 많으니까. 원래 사람은 자신의 반대 방향을 그리워하는 법이다.
TV를 보지 않는데 어쩌다 한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인도네시아에서 고기를 잡는데 바대가재가 나왔다. 바다가재는 2쌍의 촉각이 있는데 하나를 부러뜨리면 방향 감각을 잃어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어부들은 그렇게 바다가재를 자신의 주변에 놓아두고 다른 고기를 잡는다. 그리고는 나중에 방향 감각 없는 바다가재를 들고 물 밖으로 나온다.
서글프지만 그 가재의 모습이 나같았다. 보는 당시에는 몰랐는데 문득 떠오르는 내 모습과 방향을 잃은 바다가재의 모습이 겹쳐진다. 헌데 그리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 그 이유를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작품을 쓰진 않을거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실력이다. 다만 편견없이 받아들이고 서스름없이 표현할 거다. 진부한 표현이라고 미리 걷어내지 않고 그 진부함이라도 한 번은 내것으로 만들고 그 진부함을 있는 그대로 느껴볼테다. 그러는 중에 또 한 걸음을 내딛은 내 자신을 보게 될지 어찌 알겠는가?
굳이 말하자면 유행이고 트렌드다.
정신분석에 기반을 둔 심리 관련 서적 얘기다. 사실 '심리학'이 쓰이지 않는 분야가 없다. 광고, 마케팅부터 정치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대중의 심리를 알아야 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결코 쉽지 않은 학문이지만 최근 쉽고 재미있게 저술된 여러 책들 덕분에 '심리학'이라는 분야가 한층 대중에게 다가온 느낌이다.
저자는 역시나 신경정신과 의사. 꽤나 공부를 많이 하신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런 책은 수요가 있기때문에 출판이 된다는 입장인데 그 사실을 증명이나 하듯 베스트 셀러 10위 안에 포함되어 있다. 정신과 의사가 이런 종류의 책을 집필하기 좋은 이유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 진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날수 있고 각 사람은 너무나 다양한 사연들이 있다. 독자는 그런 사례를 통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삶이 있구나'
'나는 이런 삶이 아닌것이 다행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며 공감하기도 하고 안심하기도 한다.
왜 이런 종류의 책이 꾸준히 나오는지 생각해 봤다.
그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사회적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산업 사회를 통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어느 정도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시대에 이르렀다. 이젠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시대임과 동시에 경쟁에서 뒤쳐진 자들이 더 큰 물질을 향한 질주를 갈망하는 때이기도 하다. 그 모든 가치들의 혼재속에 인간의 정신은 병들고 관계는 예전만큼 단순하지 않다. 나를 알고 남을 알아야 이 험난한(?)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이 든다.
이 시대의 모습은 이미 10년 혹은 20년 전 선진국에서 겪었던 현상이기도 하다. 뉴스를 보면 강퍅한 인간의 모습에 깜짝 놀라는 소식들로 가득하다. 단순히 책 한 권을 읽은 것이지만 지금 한국은 꽤나 위기의 시간에 서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해 봤다.
읽은 책은 쌓여가는데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것은 점점 더 더디게 진행된다.
글 한 편 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작품'을 쓰려는 무의식이 강한게 아닌가 생각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하루키의 수필집.
혹자는(때로는 작가도) 글의 주제가 없다고 하는데 적어도 난 이런 글이 좋다. 주제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제'라는 것이 독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거창한 주제를 내세워 읽기 전부터 부담을 주는 글이 있는가 하면 가볍게 툭툭 던지는 글 속에서 때론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는 글도 있다. 그의 글이 그러하다.
하루키의 글은 매력이 있다. 그의 작품을 접하기 전에는 왜 그리 인기있는 작가인지 공감하지 못했다. 다시하는 말이지만 고등학교때 처음 접했던 '상실의 시대'는 조금 두꺼운 책에 불과했다. 그의 진가를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편안하다. 쉽게 몰입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작가도 쉽게 쓴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때도 있다.
그를 통해 알게된 사실은, 문체라는 것은 사용 언어에 영향을 받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일본어로 쓰여진 글을 한국어로 번역했음에도 '무라카미 하루키'만의 독특한 문체는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다. 당연한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그의 스타일은 독특하다. 그런 특별함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글을 잘쓰고 싶다는 생각과 이런 천재성은 타고난 것인가 하는 일종의 낙담이 그것이다. 그런 부담감 때문일까? 최근에는 글쓰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잘 써야 한다는 무의식이 글을 쓰는 내내 나를 지배하고 있다. 사실 글은 부담없이 써야한다. 한 번에 좋은 글이 나오지도 않는다. 더욱이 작품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태어나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부담감은 글쓰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알면서도 안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카페를 가면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왜?
그 카페의 커피 맛을 알 수 있는 척도니까.
그렇다고 에스프레소 만으로 그 카페를 단정짓지 않는다.
각 카페마다 특징있는 혹은 자신있는 메뉴가 있으니까.
행동 반경 안에 편한 카페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커피까지 맛있으면 말이 필요없다.
카페의 공간적인 기능과 미각적인 만족을 모두 충족시켜준다면
삶의 멋진 친구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새로운 관점 혹은 관점의 변화.
그리 큰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하지 않았지만 의외로 많은 것을 남겨준 책.
언제부터 다큐멘터리 사진,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사진, 스냅, 캔디드 같은 사진은 좋은 사진이 되었고 연출을 하거나 의도적인 무언가를 가미한 사진은 나쁜 사진이 되었는가? 내게도 이런 편견이 있었지만 사진을 시작한 사람들 대다수가 느끼는 좋음과 나쁜에 대한 기준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차피 사진도 예술의 한 분야이다. 있는 그대로를 담는 사진가가 있는가 하면 현실에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사진가도 있다. 이제까지는 왜 그리 현실에 보여지는 것, 꾸밈이 없는 것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예술이란 모름지기 자유로워야 하는데 사진을 마치 자유를 뺀 학습으로 접해온건 아닌지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현실에서 담을수 없는 것을 사진으로 담아 표현하는 것이 자유고 예술이고 또 다른 사진의 한 영역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연출된 사진이란 어설픈 것이 문제지 완벽에 가까운 연출은 한 사람의 재능과 노력을 전부 쏟아부어야 할 만큼 창조적인 영역이다.
사진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늦은 나이에 새로운 시작을 한 저자의 용기에 감동받았다. 늦은 나이에 뭔가를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는 글로 표현한다고 느꺼지는 것이 아니다. 그 상황에 처해본 사람만이 그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내 삶 깊숙이 자리잡은 사진에 대한 고정 관념에 작은 흠집을 내준 저자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앞으로 내 사진 생활은 물론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지 문득 기대가 된다. 지금은 아주 살짝 방향을 바꾼듯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면 그 작은 변화가 완전히 다른 방향이 되어있을 테니까.
거의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고 있다. 그만큼 써야할 글은 쌓여만 가는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게으름 때문이다. 글을 쓰지 못하니 생각할 시간도 함께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 단지 문자를 읽어 나가는 것이 독서는 아닐진데... 책 한 권을 읽더라도 깊은 생각이 따라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출판을 하는 것도 아닌데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행위가 조금씩 부담이 된다. 이럴땐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지금의 정체를 돌파하는 방법이다.
엄청나게 혹평을 한 책이 한 권 있는데 그 글을 쓴지는 좀 지났다. 다만 올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다. 누가 와서 보는 것도 아니겠지만 혹시 오해로 인해 저자가 마음이 아플까봐 괜한 걱정을 해본다. 아직 더 독해져야(?) 할 내 모습인가?
이젠 비는 그만 왔으면 좋겠다.
첫번째 책은 정말 재미없었다. 남들은 공감할 수 없는 본인만의 언어로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자랑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책을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할 인연인 양 정리함 속 깊숙히 숨겨놨다. 절대 다시 보지 말자는 다짐과 함께. 그것이 그녀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사람은 변하기 힘들다. 아니,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하지만 그녀는 변했다. 어쩌면 내가 변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변할 것 같지 않던 한 사람(그녀든 나든)의 변화가 책 한 권을 통해 느껴졌다.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책을 읽으면서 누구나 가져봤을 질문이나 의문, 그리고 그에 대한 그녀만의 독특한 답이 각 챕터를 구성한다. 옆에서 이야기하듯 써내려 갔지만 집중하지 않고 책을 읽다보면 그녀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큰 흐름을 놓칠수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분명 그녀는 변했다. 그녀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살아있음에도 다른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런 그녀에게 감사하기까지 하다) 작가의 글은 독자의 공감을 만날 때 폭발한다. 적어도 독자에게는 그러하다.
또 그녀의 글이 좋은 이유는 뻔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릎을 탁 칠만한 답변은 아니더라도 깊은 생각과 많은 경험이 바탕이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 독서에 대한 책만 수십권인 요즘 세상에 뻔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읽어본 사람은 안다.
나는 보통 책을 한 번 읽으면 다시 읽지 않는다. 거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같은 분야나 관련 서적을 여러권 읽기 때문이다. 비슷한 내용의 책을 계속해서 읽다보면 그 분야에 대한 핵심은 자연스레 파악하게 된다. 또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이 시대에 한 권의 책을 붙들고 있다는 것은 자칫 시대에 뒤쳐질 수 있다. 그럼에도, 여러번 읽어야 하는 책은 분명히 존재한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고전같은 책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책은 고전만큼은 아니다 하더라도 옆에 두고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줄을 치고 싶은 그런 책임에는 틀림없다.